오늘의 양식

오늘의 양식-2013년 11월 28일 묵상(요한복음 19:38-42)

주의 길을 예비하라 2013. 11. 28. 05:42

【오늘의 양식】

11월 28일(목)-『요19:38-42』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 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고,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못에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예수님의 몸이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예수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고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같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갔지만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그의 죽음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지만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처형한 자를 대부분 매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처참하게 평가되었습니다. 처형당한 자는 매장을 거절당하고 그의 시체는 맹수들과 시체를 뜯어 먹는 새들의 먹이로 주어졌던 것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십자가형은 처형당하는 당사자에게 완전한 굴욕과 수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눈물만 흐르고 흐릅니다. 우리 주님의 고통에 우리가 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켰으니 우리는 다만 그 십자가를 바라 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셨으니 나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조롱,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주님이 죽고 나를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나의 영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만 흐릅니다. 그 사랑, 그 은혜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예수님을 장사지내겠다고 선뜻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그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이 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나서서 빌라도에게 당돌히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함께 했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친한 친구도 멀어지는데,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마음으로만 지켜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지위를 잃는다 하여도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했던 제자들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을 장사하는 일을 기꺼이 행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백근, 즉 40kg 정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몸에 바르고 세마포를 입혀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을 장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악인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감사하게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함으로 부자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사53장9) 언제까지나 우리는 잠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두려워 숨을 수만은 없습니다. 제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하여도 그 일로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요셉과 니고데모를 얼마나 기뻐하고 고맙게 여겼을까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교회를 섬겨오면서 참으로 부족한 종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들이 계십니다. 기억해 주는 것이 감사하고 섬겨주는 것은 더욱 감사합니다. 저는 갚을 길 없어 다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기도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분들이 행한 대로 우리 주님께서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동산 안에 있는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산을 벗어나지 않은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는 그곳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고난의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자하는데,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인내하면 반드시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조금 더 인내합시다. 조금 더 충성합시다. 주께서 반드시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싹이 난 씨앗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는 뿌리내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하다보면 시간만 가고 얻는 것은 없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시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시면 내가 있는 그곳이 축복의 땅이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십자가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주의 영광이 임합니다. 3일입니다.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을 대신한 의인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얼마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왔습니까? 얼마동안 떠나 계셨습니까?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목자를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을 찾듯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외쳐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내가 응답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죄와 사망의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절망의 수렁에 빠져 헤쳐 나올 수 없습니다. 질병과 삶의 문제 가운데 지쳐있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로 돌아갑니다.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축복하소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