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양식】
1월 28일(화)-『계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동남쪽으로 4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트몰루스 산맥(Tmolus, 해발 약 450m 고지)의 북쪽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형 도시이며, 팍톨로즈 강에서 생산되는 사금으로 재정적으로 부강한 도시였다. 인류 역사 최초로 금과 은으로 화폐를 만들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사데의 유적지에서 순금을 제련하는데 쓰였던 도가니를 300개 이상 발견하였고, 또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의 폭이 50m, 길이가 100m나 되었으며, 모두 78개의 석주가 들어서 있는 웅장한 것이었습니다.
사데성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 왕에게 함락되었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레스왕이 사데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크로이수스와 사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데사람들을 가리키며 고레스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다.”고레스는 14일간을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사데성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특별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히에로에데스(Hyeroeddes)라고 불리는 한 군인이 사데성의 발포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데 군병의 한 명이 실수하여 자기 철모를 성벽 총구 너머로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히에로에데스는 그 곳에 몸집이 작은 사람이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틈바구니가 바위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날 밤 일단의 페르시아 군인들이 그 바위의 갈라진 틈바구니를 통해 사데성으로 침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발포대 위에 도달했을 때 그 곳에는 보초병 하나 없었습니다. 사데 사람들은 발포대에 보초가 깨어서 경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다 잠자고 있다가 사데는 함락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이 그로부터 200년 후인 B.C.218년 헬라의 안티오쿠스가 쳐들어올 때도 똑같이 깨어있지 못하다가 다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데의 이름의 뜻은 “붉은 자들, 붉은 보석, 살아남아있는 자, 남은 자의 도망, 새로운 것”입니다. 사데교회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입니다. 일곱 영은 생명의 영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말씀대로 역사합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이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또한 일곱 별, 즉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서 사데교회를 깨우고 지켜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데가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요새였지만 역사적으로 방심한 것 때문에 함락된 사실을 근거로 사데교회에 필요한 것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이름뿐 사데교회의 행위를 볼 때 죽어있고 또 마지막 남은 자들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데교회시대는 종교개혁시대로써 A.D.1517~1750년까지를 가리킵니다. 종교개혁의 배경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종교개혁은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나 프라하의 존 후스(Johann Huss)들이 부패한 교회 관습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으며, 교회 자체내에서도 불만이 점차 증가한데서 시작되었습다. 이미 중세 말부터 인간성 회복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었으며 또한 신과 인간의 매개자 없이도 신과 인간의 직접교류가 가능하다는 신비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또한, 그러나 종교개혁의 직접적 배경은 면죄부 판매입니다. 유리우스 2세 때 시작하여 레오 10세 때까지 계속된 성 베드로(St. Leter) 성당의 건축비를 조달하기 위해 면죄부 발행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수사인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데 “면죄부의 악용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붙이며 면죄부 판매행위를 전반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루터는 구원이라는 것은 면죄부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임을 강조하였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항의문은 전 유럽에 반향을 일으켰으며 루터는 이 후 이단으로 고발되어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1520년에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후 제국회의에서 카알 5세가 보름스(Worms)제국회의에서 루터의 저서를 금서목록에 기록하였고 루터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서 은신하여 약 10개월에 걸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이에 인쇄술의 발달로 성서가 보급되었습니다. 또한 루터 자신의 견해를 지키려는 그의 행동은 특히 독일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루터의 지도에 따라 교회를 탈퇴하여 로마교회에 대해 전면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제가 기독교회사에 밝지 못해서 좀 더 깊게 연구해 볼 필요성을 느낍니다. 사데교회에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초로 하면 종교개혁을 통해서 카톨릭의 그릇된 교리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온전히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지는 못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시의 교회를 볼 때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장로교는 예정설이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절대적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따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書信)”이라고 경멸한 것을 볼 때 얼마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하고 행위구원을 멀리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구원에 있어서 믿음을 강조하는 로마서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입니다. 둘 다 버려서도 조금도 멸시하거나 잃을 수 없는 보배중의 보배입니다. 믿음만을 주장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행위만을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집을 짓는다고 가정했을 때 믿음은 반석과 같습니다. 즉 기초입니다. 그런데 기초만 닦아놓고 집을 다 지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안심하고 신앙생활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삶을 통해 보여주지 못하고 교회와 집과 직장에서 서로 다른 사람처럼 삽니다. 또 기초 없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크게 높게 지을수록 더 쉽게 무너져버립니다. 자기 안의 갈등이나 외부의 영향에 노출되면 그리스도에 기초하지 못한 신앙은 혼란과 함께 스스로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초가 집이라고 할 수 없듯이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도 죽은 믿음, 미완성 구원입니다. 종교개혁시대가 믿음의 보화를 캐내는 대신 온전한 구원을 위한 옳은 행위를 밟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처럼 오히려 참된 구원에서 더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믿음은 삶 자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난 또 다른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 종교개혁이 성공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회복되었다면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는 책망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죽은 믿음이요,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저도 온전하지 못한 것은 똑같습니다. 저의 모습 때문에 스스로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말씀을 섬기고 묵상의 말씀을 블로그에 올리고 카톡이나 문자로 보내고 있지만 내가 이것을 할 만 한 자격이 있는지 제 자신에게 질문할 때가 많습니다. 그만두자 생각이 들면서도 이 일이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보내드립니다. 아무쪼록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모든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반쪽의 종교개혁이 아니라 내 안에 개혁이 일어나야합니다. 나의 구원을 어떤 교리가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장로교의 교리, 감리교의 교리, 순복음의 삼박자 축복, 오중복음의 교리 그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확증해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누구로부터 듣고 배워야하므로 또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 가장 필요한 은사가 바로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말을 분별하고 그 배후의 영들을 분별해야 우리가 미혹당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행위를 보실 때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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