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양식】
1월 29일(수)-『계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샬롬^^ 오늘도 평강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내 마음이 내 것이지만 이 마음조차 지키지 못할 때가 많은 연약한 우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영혼들이 마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오히려 세상과 원수 마귀에게 내어줌으로 우리 한 영혼, 한 영혼을 아낌없이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생각은 또한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라고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육신의 생각, 육신의 욕심을 쫓아 행합니다. 마음은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콩밭에 있다는 말처럼 내 마음은 어디엔가 있게 마련입니다. 생각은 방향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으로 내 생각은 따라갑니다. 마음을 세상에 두고 살고 원수에게 내어주면 생각도 그렇게 따라갑니다. 하지만 마음과 영으로 존재하시는 아버지께 내 마음을 드리면 성령께서 거룩한 생각으로 한 영혼을 이끄십니다. 육신의 생각을 이기고 영의 생각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기도와 간구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하면 생각은 더욱 원수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리고 감사입니다. 환경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감사하고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누구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환경과 사람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원수의 시험과 유혹을 넉넉히 이깁니다. 기도는 내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줄입니다. 기도는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요,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수고입니다. 영적인 땀 흘림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깨어있는 것, 나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사데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경성함입니다. 깨어있는 영혼이 그나마 죽어있는 교회에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어줍니다. 교회 가운데 더 많은 성도들이 깨어있고 기도의 성벽을 지킬 때 믿음이 방패로 원수의 불화살을 막고 성령의 검 말씀으로 원수의 머리를 쳐서 이기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믿은 나머지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성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적군에게 올라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데교회는 구원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카톨릭에서 겨우 벗어난 교리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반쪽짜리 구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면죄부 판매와 같은 그릇된 구원에 올무에서 벗어났지만 온전한 행위에 이르지 못한 믿음의 교리라는 또 다른 올무에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칼빈 신학을 추종하는 전세계의 많은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칼빈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은 인물입니다.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함께 신학계의 3대 저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로교 창시자 칼빈[1509~1564]은 프랑스 태생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생명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천재적인 학자였으며 선구자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큰 공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입니다. 칼빈은 제네바시의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들의 생활을 감독하고 정화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감시위원회, 즉 ‘종무국’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래서 1555년까지 엄격하게 조직된 신국(神國)이 제네바에 형성되었고, 제네바는 개혁된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교회와 세속의 법규는 긴밀하게 조립됐고 제네바 시민들의 사생활은 물론 오락과 여흥까지도 법률로 금지되었습니다. 독서, 경기, 노래, 회식등의 자유가 통제되고 무용, 카드놀이, 소설책이 금지되고 심지어는 이발까지도 통제되었으며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조직은 마음대로 시민들의 사생활을 파악하고 품행을 감독했습니다. 과도한 엄격성으로 빚어진, 교통의 요지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던 제네바의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은 첫 5년 동안 무려 56건의 사형선고와 78건의 추방 등 혹독한 진압으로 굴복됐습니다.
1559년 칼빈은 제네바 신학교를 설립하여 거기에서 배출된 수많은 설교가들은 전유럽에 칼빈의 교회제도, 신학과 사상 등을 전파하였습니다.
칼빈은 목사로서 일개 회원에 불과 했으나 [성경 해석자]로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특별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성경 해석자로 최후의 판결권을 독점했으며 실제로는 종교법원을 좌우할 수 있는 판사의 역할까지 담당했습니다. 그의 성경 해석 여하에 따라 죄의 유무와 경중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시정을 관리하여 음주, 방탕, 저속한 노래 등의 금지시키고 교회 규율도 엄격해 신도들을 투옥, 추방하고 사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종교적 범죄자를 잔인하게 처벌했습니다. 춤을 추었다고 투옥하고, 설교를 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하고, 부모를 구타한 소녀를 목잘라 처형하고, 귀신 쫓는 마법사도 사형 시켰습니다. 스페인 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le Servetus:1511-1553)는 의학자요 신학자요 철학자인 천재였습니다. 칼빈을 도왔고 승리를 안겨준 동지였지만,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비판해 피신하여 살다가 1553년10월27일 화형당했습니다. 구루엣은 칼빈의 주장을 어리석은 교리라고 썼다는 이유로 반역과 모독죄로 목이 잘리는 죽임을 당했으며, 칼빈이 설립한 종교법원의 파문권에 도전했다는 죄로 버틸류와 그의 지지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칼빈은 자신과의 해석이 다르고 따르지 않으면 그 자신이 절대시하던 성경을 무시하고"이단"이란 죄목으로 수없는 살인을 감행하였으니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성경의 절대성을 무시했습니다. 칼빈은 자기의 권위와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엄한 벌을 내렸습니다. 특히 자기를 Mr.즉 Monsieur Calvin으로 부르지 않은 사람이나 자기의 설교나 훈계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는 3일 동안 빵과 물을 금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죽을 위기에 있을지라도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죽였습니다. 자신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칼빈이 자행한 참혹한 고문을 보면 '(사람의 가죽을 벗겨낸 후) 소금으로 문질렀다'(stefan Zweig. op. cit. p.193)라고 하였습니다. 피가 흐르는 그 곳에 소금으로 문지르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고통이 얼마나 끔찍하고 사악한 행위인가는 두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칼빈은 불에 그슬려(화형) 죽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천천히 온갖 방법으로 고통을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불에 그슬려 죽인다는 것은 곧 화형을 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카톨릭이 자행한 종교재판에 의하면 1211년 라바우어(Lavaur)라는 지역에서는 하루에 400명의 사람들이 산채로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주로 샹펠 광장에서 화형이 처해지곤 하였습니다. 칼빈은 4년 동안에 35명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화형에 처해 죽였다고 합니다. 4년이 아니라 10년, 20년을 다스렸다면 수백, 수천 명이 또 다른 종교재판의 희생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칼빈의 사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한 세르베토의 몸을 벼룩이 뜯어먹도록 방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르베토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설물까지 치울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고문 방법은 카톨릭이 행하였던 고문방식과 같은 것으로 카톨릭은 마룻바닥이니 벽에 쇠사슬로 묶어 두고 피냄새로 달려온 쥐들이나 해충(vermin)의 먹이가 되도록 하여 극심한 고통을 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고문 방식이 칼빈에게도 동일하게 취급되어 실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찮은 죄목으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잔혹한 형벌을 가하자 고문을 당해 본 사람은 다시 고문을 당하기 전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시의회가 취한 아주 특이한 자살방지 제도가 다름 아닌 밤낮으로 감옥의 죄수들로 하여금 박수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에 대한 위 사실들이 칼빈주의자나 저도 장로교회 출신이지만 장로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은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는 것이 옳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 없는 행위는 받지 않으십니다. 강압에 의한 복종은 결코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법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종교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데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들은 것은 믿음이 있으되, 행위가 없고, 행위는 있으되, 마음 없는 행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살리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누가 나를 살립니까? 올바른 교리도 필요하지만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역사를 나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모든 영혼들을 살립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양식 2014년 1월 30일-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요한계시록 3:1-6) (0) | 2014.02.02 |
---|---|
오늘의 양식 2014년 1월 30일-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요한계시록 3:1-6) (0) | 2014.01.30 |
무료 화면 캡쳐 및 동영상 녹화 프로그램 오캠(oCam) (0) | 2014.01.28 |
오늘의 양식 2014년 1월 28일-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를 찾지 못하였노니(요한계시록 3:1-6) (0) | 2014.01.28 |
오늘의 양식 2014년 1월 26일-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을 주리니(요한계시록 2:12-17) (0) | 2014.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