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양식】
1월 15일(수)-『계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세 번째 교회는 버가모교회입니다.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km에 위치해 있고 240 높이의 바위가 많은 원추형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로마의 대법원이 있었고 도서 20만권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는 종교,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종교적 배경으로는 13절에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는 말씀처럼 고대 세계 종교의 집합지입니다. 6개의 그리스 신전이 있었고 애굽의 세라피스 신전과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특히 치료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사람들은 아스클레피오스를 구주라 불렀고 그 상징은 뱀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에 아스클레페이온이라는 종합병원이 있었는데, 돌기둥에는 뱀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종합병원이나 의과대학에 가보면 그 입구에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가 그려져 있거나 조각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마크나, 우리나라 대한의사협회 휘장에도 동일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세상 의학의 뿌리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치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실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질병이 오고 사망이 이르렀습니다. 질병의 근원은 죄의 문제가 많고 흑암의 세력들 즉 귀신들이 사람의 몸을 더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의학의 발달로 점점 하나님의 치유를 등한시하고 의지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믿음으로 선포해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의술로 육신의 병은 고침 받을지언정 영혼의 질병은 치유 받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잠간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영혼이 사망에 들어가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있던지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입니다. 내가 영원한 것을 붙들지 않는다면 이 세상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유황 불 못에 들어갈 때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없는 모든 영혼들도 함께 던져집니다.(벧전1:24,25)
버가모는 ‘결혼하다’ 특히 중혼을 의미하고, ‘탑, 높이 들리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혼이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시 혼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그 이름과 지역적인 특성과 종교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장차 다가올 교회시대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 시대는 핍박과 고난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313년 콘스탄틴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여기에 가장 큰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당연히 지금까지 극심한 핍박 가운데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신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결과가 꼭 교회에 진정한 승리와 축복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주교들 위의 주교이자 열세 번째 사도라고 칭하며 신격화 했고 교회를 자신의 통치를 받는 조직쯤으로 여겼습니다. 교회는 정부의 지지를 받게 되면서 불신자들이 벌떼처럼 교회로 몰려들었는데 이 현상은 교회에 그저 얼굴 한 번 비치고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버가모교회 시대를 일컬어 “세속과 타협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결국 신앙의 자유와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배도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그 이름의 의미처럼 영적으로 교회가 세상과 혼인하여 간음한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정치와 야합하여 정교 일체의 행정을 취함으로 교회는 세속화되고 교직자는 교권과 물질에만 탐하므로 부패하여 졌던 것입니다. 종교의 암흑시대라고 하는 카톨릭의 기틀을 마련한 때가 바로 버가모교회시대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실 때도 그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싸우십니다.(계19:15)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고 교회가 지하묘지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무슨 싸울 것이 있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서머나교회에 나타나야할 그리스도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버가모교회시대에 주님은 두 날선 칼을 들고 나타나십니다. 신앙의 자유와 함께 교회의 위기가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행하지만 그릇된 방향으로 교회가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라고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불렀을 때 발람이 거절하다가 결국 돈과 명예에 눈이 뒤집혀 따라갔던 것처럼 로마 황제의 두터운 신임 속에 교회는 급속하게 세속화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약으로 치유가 안 되면 칼을 대는 것처럼 타락한 교회는 진리의 성령의 검으로 대수술을 받아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던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원수 마귀는 어떤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와도 결국 사망을 가져옵니다. 교회와 성도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거짓선지자들을 어떻게 밝혀낼 수 있습니까?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속기 쉬운 것이 사람의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사람의 말, 미혹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칼도 날카롭게 갈아야 되는 것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속히 돌이켜야합니다. 세뇌가 무엇입니까? 거짓말도 계속 반복적으로 들으면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에서 사기 당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망하는 길을 갔습니다. 그릇된 호기심을 버려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곳에 구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붙들고 사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버가모교회시대를 통해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결국 종교의 자유가 교회의 타락을 가져온 것을 볼 때 그 뿌리가 어디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아지는 것, 결국 그 곳은 사단의 위에 앉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가장 위험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곳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세상의 높은 곳이 아니라 갈보리 십자가로 올라가야합니다. 우리의 높은 곳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나는 주님과 정혼한 신부로써 나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주여! 주의 말씀의 검으로 내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셔서 내 삶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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